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룀 (문단 편집) == 1차 세계 대전 직후 ==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10만으로 제한되지만, 여기에 남는 것을 허락받은 것으로 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하다. 이 무렵 독일군은 군대 해체로 남게 된 무기를 민간에 넘겨서 [[준군사조직]]인 [[민병대]]를 조직하려 했고, 룀은 대량의 무기를 모아서 비밀 무기고에 보관한 다음 여러 민병대와 향토군에 보급했다. 룀은 현역군인 신분으로 베르사유 조약으로 부대가 해체되어 사실상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외 위장 군인 집단인 [[자유군단]]에 연계하여 활동하였고 이어 [[나치]]에 가입했다. 그는 나치의 초창기 멤버들 중 하나로서 공산당 조직과 싸우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고, 또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 1923년 11월 [[뮌헨]]에서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아 [[뮌헨 폭동]]을 일으켰으나 시원하게 망했다. 룀은 현역군인으로서 여기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때문에 룀도 함께 체포되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고 불명예 제대 처분을 당했다. 본래 중형이 내려져야 하지만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던 바이마르 시절 정치범들은 또 반발로 인한 폭동과 정부요인 대상으로 한 테러를 염려하여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물론 좌익 폭동이 더 엄격하게 다뤄지긴 했지만 도긴개긴. 그러나 룀이나 히틀러는 이런 솜방망이 처벌로 받은 형기를 제대로 복역하지도 않았는데, 룀의 경우 당시 법원의 안이한 처사로 준법서약만 하고는 즉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가 옥중에서 [[나의 투쟁]]을 저술하는 동안 룀은 불법화된 SA 대신 "프론트반"이라는 합법 조직을 만들었다. 나치당은 "민족사회주의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나섰고 룀도 의회에 진출했으나, 정쟁에 휘말려 그 자리를 금세 내놓고야 말았다. [[1928년]]에 [[볼리비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남미로 떠나, 군사고문직을 역임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